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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에 도착한 첫날 밴쿠버 국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 근처에 내렸다. 출국 전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둔 Hostel을 찾기 위해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더니 아래로 내려 가면 된다고 하길래, 한참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지도를 보니 반대 방향이었다. 그래서 다시 위로 위로 걸어 올라가서 다시 길을 물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반대 방향이었다. 문제는 그 Hostel이 있는 개스타운 인근 거리는 찾았는데, Hostel 간판이 도통 눈에 띠질 않았다.



두어바퀴 같은 길을 돌다가 길을 지나가던 남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기가 거기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절할 수가. 이곳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친절한 모양이다 싶었다. 예약해 두었던 Hostel을 그 남자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코 앞이었다. 그런데 워낙 간판이 작았던 탓에 나같은 초행자는, 더구나 해가 진 어두운 밤에 쉽게 찾을 수가 없었던 거다. 고맙다고 말하고 Hostel로 들어가려는데 그 남자가, 차를 세워두고 가족들이랑 식사를 했는데, 주차비를 낼 돈이 없어서 식당에서 나머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주차비를 조금 줄 수 없겠느냐고 그랬다. 이 얼마나 상식을 살포시 뛰어넘는 아름다운 요구인가? 그 친구 아니었으면 제 시간 내에 숙소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호주머니를 뒤져 루니하나 꺼내서 줬다. "미안한데 돈이 없다. 어쨌든 고맙다." 


그러면서. 방에 들어가서 처음보는 친구들이랑 가볍게(물론 어렵게) 인사를 몇 마디 주고 받고 나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원래 그렇냐고. 원래 그렇단다. 이곳 밴쿠버에는 노숙자들이 바글바글하단다. 같은 방 중국인 여행객이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보더니 못 먹었다고 하니 공동 주방에서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먹거리를 챙겨줬다.


위. 개스타운(Gastown)


다음날 아침 6시가 조금 못 됐을 시간에 일어나 씻고 길을 나섰다. 차이나 타운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지나다 보니 구석구석에 노숙자들이 자고 있었다. 쇼핑카트도 종종 눈에 띠었다. 해변 근처 공원으로 갔더니 그곳에도 노숙자들이 아직 단잠을 자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부둥켜 안고 있기도 했고. 


담배를 한 대 물고 길을 거닐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녀석이 말을 걸어 왔다. 담배 남은 거 있냐? 난 쪼잔한 놈이다. 없다고 그럴려고 하는데, 녀석이 먼저 돈 줄테니까 한 개비만 팔라고 그런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더니 잔돈을 이리저리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1달러 50센트를 만들어서 건넨다. 물론 내가 피우던 담배는 공항에서 산 면세품이었고, 한 갑에 2달러도 안 됐기 때문에 흥쾌히 거래에 응했다. 그런데 녀석 자전거가 괜찮아 보여서 그런 자전거 어디가면 빌릴 수 있냐고 그랬더니, 사란다. 30달러면 팔겠단다. 뭔가 이상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거래가 지나치게 쉬우면 의심부터 해보는 게 내 습성이다. 일단 보류. 담배 한 개비에 1달러 50센트인데, 멀쩡해 보이는 자전거 한 대를 30달러에? 장물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안녕. 



해변에서 시내 쪽 길로 들어섰다. 출근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출근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태우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길에서 담배를 태우고, 건물 앞에서 멋드러지게 정장을 갖춰입은 여자가 당당하게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외발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아무렇지도 않게, 정장에 가방을 메고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가는 사람들. 


그렇게 길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골목길에 있는 쓰레기통에 치마가 메말려 있길래 눈길을 한 번 줬다. 그런데 메달려 있는 건 치마가 아니라 여자였고, 그 여자는 커다란 쓰레기통에 매달려 머리를 숙여서 무언갈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 여자. 치마. 쓰레기통. 


밴쿠버에는 정말 노숙자가 많았다. 어떻게 보면 그곳이 그 만큼 풍요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잉여가 없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생존할 수 없을테니. 하지만 선뜻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애초에 기회로부터 배제됐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일까? 


같은 방을 썼던 친구들 중에서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 그 중 한 친구가 암만 노숙자라도 우리보다 영어는 잘하지 않겠느냐고, 돈 몇푼 주고 영어라도 몇 마디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랬다. 노숙자들을 보고도 영어부터 생각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각박하고, 척박한 풍토. 그냥 그 친구 한 명은 그런걸까? 밴쿠버에 머물렀던 한 달 동안 정말로 많은 노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는 꽤 괜찮아 보이는 시계를 내 보이며, 배가 고파서 식료품이라도 조금 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그런다며 사달라고 하던 친구도 있었고, 무턱대고 돈을 좀 달라고 그러는 친구들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여자아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첫 번째 숙소에서 3일을 머물고 출발 전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 두었던 두 번째 숙소로 가던 날 그때까지 너무도 길을 찾기 쉬운 밴쿠버에 익숙하지 않아서 헤매고 있었다. 차이나 타운에서 중국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영어로 몇 마디 하시다가 이내 답답해지셨는지, "Do you speak Mandarine?"이라고 그러셨다. 노.노.노. 그러던 중에 한 여자 아이가 곁에 와서는 어디가냐고 자기가 찾아주겠노라고 그랬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집을 나온 듯 했다. 노숙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눈빛이 마치 약이라도 한 듯 몽롱했다. 예쁘기도 했고. 됐다고 그랬다. 혼자 찾아갈 수 있다고. 그 친구가 몇 번이나 간절한 눈빛으로 자기가 도와줄테니까 어디를 찾아 가느냐고 물어 보았는데, 냉정하게 됐다고 그랬다. 그 친구는 돈이 필요했을 테고, 나는 만약 그 친구에게 답례조로 몇 푼의 돈을 줄 수 있었지만, 그 친구 눈빛을 보아하니 좋지 않은 곳에 쓰일 듯 해서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앞에 가던 동양인 남자가 들고 가던 커피 중 하나를 노숙자에게 다가가서는 "제가 커피 하나 드려도 될까요?"하고 물어 보고는 노숙자가 좋다고 그러니까 기꺼이 주고 가는 게 아닌가. 아니 한 10미터 쯤 가던 그 친구가 다시 돌아 와서는 커피에 넣어 먹는 것들을(설탕 등) 깜박잊고 안 주고 갔다며 주고 가는 게 아닌가. 노숙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없고를 따지기 전에 그 사람들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조금 이라도 가진 걸 나누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 함께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냉정하게 도움을 뿌리쳤던 그 여자아이의 눈빛이 가끔 생각난다. 솔직히 절박한 듯 했던 그 눈빛이 나에겐 마음의 짐이 되어 있다. 솔직히 여행하는 동안 노숙자들이 자꾸 말을 걸어와 귀찮아서 듣기에 불편한 말도 몇번인가 했었다. 미안해요. 



이기심하면 하면 '푸줏간 주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가 말하고자 했던 '이기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기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국부론이 출간되기 17년 전에 출간됐던 《도덕 감정론》에 나오는 이기심을 어떤 이는 '동감' 또는 '동포감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먼저 남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본 뒤에 자신의 이기(利己)를 추구하는 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하고자 했던 이기심이 아니었겠냐는 것이다. 많이 쓰는 사자성어, 역지사지가 바탕이라는 얘기인 듯 하다. 


언젠가 어떤 교수님께서는 그러셨다. "게임이라는 것도 상호간의 협조를 바탕을 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너무 지나치게 그것이 무시되고 있는 게 아니냐. 결과에만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니냐." 아마도 소위 말하는 페어 플래이(Fair Play)를 말씀하셨던 듯 하다.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바르게 살되, 실용적인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서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아 가고 싶다. 노력하자.


+ 2007년 7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캐나다 밴쿠버에 체류했다. 이 글은 여행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적은 글이다. 비공개 블로그에 있던 글을 옮겨 둔다.